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리폴리 백국 (문단 편집) === 동로마 제국을 해적질하다 === 그는 [[성전 기사단]]원들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백국의 방위를 다졌다. 그가 모은 군대가 성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때는 1157년으로, 요르단 강에 위치한 성 야코부스 항구를 지나던 수백명의 십자군 기사들과 [[보두앵 3세]]가 누르 앗 딘에 의해 기습당했을 당시 백작의 군대와 [[르노 드 샤티용]]의 안티오키아 공국군이 연합하여 누르 앗 딘을 격파하면서부터이다. 그 뿐만 아니라 1157년 8월에 강진이 우르트메르를 휩쓸자 트리폴리 백작은 이 재난을 이용하여, 아직 지진의 여파로 요새를 복구하는 중이었던 북시리아의 여러 무슬림 영주들을 기습했다. 여기 더해 플란더스의 대백작 테오데릭의 군대가 트리폴리에 상륙해 그를 지원하기로 하고, [[르노 드 샤티용]]까지 합세했다. 그들은 카스텔 루지 성과 샤이자르를 공성하고 하랭크를 점령했다. 그러나 르노가 샤이자르가 점령되기도 전에 자신의 종주권을 주장했고, 결국 앞의 두 성 포위전은 흐지부지될 수 밖에 없었다. 1160년, 로마 제국의 [[마누일 1세]]가 아내 베르타의 죽음 이후 새 신부를 찾고 있었다. 레몽은 자신의 여동생인 멜리장드[* 당시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그녀를 둔 서사시가 생겼을 정도.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에서.)]를 황제에게 시집보내 위신을 높일 계획을 꾸몄다. [[보두앵 3세]] [* 그는 내심 멜리장드를 밀고 있었다. 마리아가 로마 제국과 혼인을 맺으면 안티오키아가 제국의 봉신령인것이 확정되기 때문..] 와의 서신을 통해 마누일 황제에게 시집갈 우르트메르의 공주 명단에서 두 명이 최종후보로 뽑혔다. 한 명은 전임 안티오키아 공작의 딸인 마리아와, 레몽의 여동생이자 예루살렘 왕의 외사촌이었던 멜리장드였다. 멜리장드의 이모인 [[멜리장드]]와 어머니 호디에르나는 거금을 들여 황후에 맞는 격식으로 예물을 차렸고, 레몽도 소함대를 꾸려 그녀를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보낼 준비를 했다. 그러나 마누일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지배권을 확립할 겸, 제국 내 라틴 귀족들과 친해질 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를 신부로 낙점했고, 트리폴리 백국은 실망의 도가니에 빠졌다. 혼담이 성사되지 못하고 낙담한 멜리장드가 수도원에서 어린 나이에 요절하자, 백국 신민들의 실망은 분노로 바뀌었다. 백국의 빈민, 부량자들은 앞다투어 레몽의 함대에 입대했고, 로마 제국에 혼수를 전달하려고 건설한 소함대는 그대로 전함으로 개조되어 [[동로마 제국]]으로 칼끝을 돌렸다. 1161년부터 레몽의 함대는 로마인들의 땅을 무제한 약탈하고 상선들을 해적질했다. 가장 부유한 제국 속주중 하나인 키프로스 해안에서 엄청난 수의 피해 신고가 들어왔다. 그 뿐만 아니라 트리폴리 함대는 [[정교회]]의 성지들과 수도원, 심지어는 그곳을 통해 우르트메르를 순례중인 [[순례자]]들까지 마구 살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